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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교회"(마 25:40 )

루터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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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Ⅲ.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과 북미 루터교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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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자들루터교회
댓글 0건 조회 531회 작성일 21-08-0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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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과 북미 루터교회 


1. 유럽

 

20세기가 시작될 때 유럽의 루터교회는 여전히 자유주의 진영과 보수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16세기 루터파 신앙고백서에 대한 루터란의 헌신도도 각기 달랐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경험한 대부분의 신학자는 이것이 낙관적 신학적 자유주의의 파산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세계대전의 경험은 보수주의적인 반응과 아울러 루터교 신앙고백을 따르는 교회들 간의 협력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대부분의 루터파 신학자들은 전반적인 개신교 신학의 방향 전환을 따랐는데 개신교 신학은 자유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종교와 문화, 신학과 철학, 신앙과 과학 사이의 통합으로 나갔다. 유럽에서는 변증법적 신학으로, 북아메리카에서는 신정통주의로 알려진 이 운동은 하나님의 타자성과 하나님 말씀의 중추적인 중요성을 강조했다. 신정통주의의 핵심 인물은 스위스 태생의 개혁교회 신학자인 칼 바르트(1886-1968)로서 그는 독일과 스위스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런데 모든 신적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련시키는 바르트의 신학적 전제들이 점점 더 분명해지자 버너 엘러트(1885-1954)와 파울 알트하우스(1888-1966)와 같은 루터파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마르틴 루터 사상의 이해에 근거한 보수적인 루터교적 관점을 발전시켰다.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독일 내 루터교회들이 국가(영토) 교회로서 해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의 헌법은 국가와 교회의 구분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에게는 계속해서 약간의 특권들이 부여되긴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불만 및 기타 요인들로 인해 히틀러가 19331월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독일 내 루터교회들 내부에 위기가 발생했다. “독일 크리스천들이라는 어용기구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루터교 지역교회들을 장악하고 중앙집권화된 단일 개신교단을 수립하려고 했다. 이는 자치적인 지역 시놋들을 유지해온 오랜 전통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1934년 루터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개혁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목사들의 비상 연합을 구성하였으며 이 연합으로부터 바르멘 선언이 나왔다. 이 선언은 전통적인 개신교 교리를 확인하였으며 전통적인 신앙 고백적 표준에 충성하는 목사들과 교회들로 이루어진 고백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신앙고백적인 마음을 가진 진영과 독일 크리스천들사이의 신학적, 정치적 대립이 193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독일 교회 투쟁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에서 마르틴 니뭴러 목사(1892-1984. 1차 세계대전 중의 잠수함 함장으로 훈장을 받음)와 같은 루터교회 소수파 지도자들은 나치 정권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1906-1945)를 포함한 몇몇은 반()나치 투쟁에 더욱 적극적이 되었다.

 

20세기 중반까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독일과 같은 전통적인 루터란 국가들의 교회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교회 예배참여율은 하락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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