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Ⅳ. 유럽과 북미를 넘어선 전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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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유럽과 북미를 넘어선 전파
유럽과 북미의 루터교회는 다른 모든 개신교회들처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위대한 19세기 복음 전파사업에 동참했다. 18세기에도 선교 활동이 있었지만 19세기 선교 활동에 특징적인 조직과 열정이 부족했다. 새로운 선교의 헌신은 수많은 선교 단체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 예로는 베를린(1824), 덴마크(1821), 라이프치히(1836) 선교회가 있다. 루터란 선교 활동은 동인도 지역, 뉴기니, 남서아프리카(현 남미비아)에 집중됐다. 점차 새로운 루터교회들이 세계의 전 지역에 세워졌다. 20세기 중엽 많은 신생 루터교회들이 유럽의 전통적인 루터교회들에는 없어 보이는 역동성과 성장세를 보였다.
1.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1706년 인도에서 시작한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라이프치히 선교회가 트랑케바르와 타밀복음루터교회에서 경건주의 선교사역을 계속 이어갔다. 1849년부터는 스웨덴 루터교인들이 도왔다. 독일 고스너 선교회 선교사들은 인도의 고지대로 갔으며 란치에 정착했다. 그들의 사역은 1857년 이후 매우 성공적이었다.
인도네시아(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가 1949년 독립함)에서는 레니시 선교회 선교사들이 사역을 했는데 지도자는 “바탁 민족의 사도”라 불리는 루드빅 놈멘센(1834-1918)이었다. 선교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됐는데 모든 연령대를 위한 학교를 세웠고 바탁 선교사들을 훈련했으며 독일에서 디콘네스들(여성 전문 봉사자들)을 데려왔다.
호주(1901년 이후 연방 의원 국가)에는 1838년 베를린 고스너 선교회가 목사들, 평신도들, 장인들을 보내 브리스베인 가까운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뉴질랜드의 루터란주의는 1843년 일부 독일 루터란과 함께, 1890년대에는 미국 미주리 시놋 목사들이 도착함으로써 시작됐다. 마오리출신 개종자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신학원에서 훈련받았는데 1912년 졸업한 후 자기 민족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파푸아 뉴기니에서는 노이엔데텔자우, 레니시 선교회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었다.
중국(1949년 이후 공산인민 공화국)에서 루터교 선교는 그리스 정교회, 가톨릭의 예수회,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미 17세기에 시작한 선교사역에 동참했다. 루터교 목사인 칼 귀츨라프 (1809-1851)는 베를린에서 교육을 받고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았는데 성경을 시암어(태국어)로 번역했고 대중 취향의 여행담을 통해 유럽에서 중국 선교를 선전했다. 다른 독일 선교사들과 스칸디나비아 출신 미국 선교사들 등도 지역을 달리하여 일했는데 1900년에 발생한 의화단 운동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이 핍박을 받았다. 홍콩(1841-1997년 영국이 통치. 현재는 중국의 특별행정구)의 루터란주의는 1847년 독일의 레니시 선교회 선교사 두 명이 옴으로써 시작됐다.
일본에는 첫 번째 루터란 선교사들이 1892년 도착했는데 미국루터연합 시놋(남부)으로부터 파송된 두 명의 미국인, 한 명의 덴마크인, 핀란드 목사와 부인 그리고 또 다른 여성 사역자였다.
한국에는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칼 귀츨라프가 1832년 여름 서해안 고대도 등지에서 1개월간 주민에게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조정(순조)의 정주 허락을 받지 못하고 떠났다. 이후 1958년 1월 미국 루터교 미주리 놋시에서 파송된 세 명의 선교사(바틀링, 도로우, 보스)가 선교를 시작했으며 한국에서의 루터교 선교를 호소했던 지원용 박사가 9월에 합류했다. 한국전쟁 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깨끗한 출발을 표방하고 기존의 한국 교회에 “플러스” 한다는 선교전략을 세워 초교파 매스미디어 사역을 시작했으며-루터란아워(방송), 새 생명(잡지), 루터연구(신학잡지), 기독교통신강좌(성경연구), 베델성서연구(성경연구), 컨콜디아사(출판사업) 등으로 확대 이후 전통적인 교회 개척을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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