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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교회"(마 25:40 )

루터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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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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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자들루터교회
댓글 0건 조회 870회 작성일 21-03-2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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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 


  2. 신앙고백주의화


독일의 루터파 교회들은 법적인 지위가 확보되었지만 큰 혼란에 빠졌다. 루터의 사상에 대한 권위 있는 이해와 관련한 신학 논쟁들(일부는 이미 루터의 생전에 발생했다)로 인해 루터파 신학자들과 교회들이 서로 나뉘었다. 논쟁의 대부분은 루터와 멜랑히톤이 견해 차이를 보였거나 또는 루터의 신학적 견해가 명약관화하지 않은 주제들과 관련되었다. 1548년에서 1577년 사이 루터교 신학자들을 사로잡은 논쟁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성경이 인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엄격히 금지하지도 않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 신앙의 교리가 크리스천들에게 구약에 제시된 도덕법 수행의 의무를 면해주는가의 문제, 이신칭의 교리,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기여 문제, 성찬 안 그리스도의 임재 양식 등등.

 

두 파가 갈려 논쟁에 참여했는데 필립파와 플라키우스가 영도하는 엄수 루터파였다. 플라키우스는 인간들이 자신의 구원에서 하나님 은총과 협력한다는 필립파의 신인협동론에 대해 비난했다. 엄수 루터파는 또한 성찬에 관한 필립파의 이해에서 칼빈주의의 영향을 보았는데 칼빈주의자들은 성찬에서 그리스도가 영적으로실재하신다고 가르쳤다. 반면, 루터는 성찬에서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임하신다고 가르쳤었다.

 

루터파 통치자들 특히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는 야콥 안드레아이(1528-1590)와 마르틴 켐니츠(1522-1586, “2의 마르틴”)의 도움을 받아, 논란이 된 신학적 주제들에 대해 양 진영이 합의하도록 요구했다. 안드레아이와 켐니츠는 즉각적으로 일단의 루터파 신학자들이 문서를 작성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1576년과 1577년에 나온 일치 신조문”(포뮬라 컨콜디아이)이다. “일치 신조문은 독일 루터파의 정치 지도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승인을 받았으며 이후 1580년의 일치서에 포함되었다. 일치서에는 이 외에도 고대의 에큐메니컬 신조들인 사도신조, 니케아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종교개혁 시기에 나온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의 변증서, 슈말칼드 조항들, 교황의 권세와 수위권에 관한 논문, 루터의 소교리문답서와 대교리문답서가 들어 있다. 기독교한국루터회는 신앙의 기본으로서 신구약 성경을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며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위의 신조들을 기독교의 대표적 교리와 성경의 올바른 해석으로 또는 루터의 복음주의신학과 그의 종교개혁에 대한 해명으로 인정한다.

 

일치서는 독일 루터란주의의 신앙고백적 정체성을 담고 있다. 이는 당시 다른 기독교 전통들 내에서 일어난 발전과 비슷했는데 각 전통은 다른 전통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경쟁적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루터란정체성은 신학만 아니라 예배 의식, 음악, 법률, 경건도 포함했다. 16세기 후반 이후의 이러한 정체성 형성과정을 신앙고백주의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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