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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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
3. 정통주의
『일치서』의 신앙고백서들에 서명한 루터교회들은 정통교회로 간주되었는데 정통주의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까지의 루터란주의를 빚어냈다. 가톨릭교회는 트렌트공의회(1545-1563)의 규범들에 인도되었는데, 공의회는 교회의 일부 오용(用)들을 개혁했지만 종교개학자들이 주장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가르침을 정직하고 ‘성경과 전통’, ‘믿음과 선행’, ‘은혜와 공로'를 고집했다.
루터교 정통주의는 모든 기독교 사상과 삶을 단순화하고 정치적, 교회적 획일성을 위한 체계를 세우려 한 대학 신학에 단단히 기반을 두었다. 졸업생들은 “순수한 교리”의 목사와 교사가 될 것이었다. 사실상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모든 루터교 영토들이 정통주의를 받아들였다.
정통주의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논리학의 범주들을 활용하여 주장과 반대주장을 머리카락 쪼개듯 세세하게 전개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을 표현했다. 루터에게 두드러졌던 이성과 계시 사이의 긴장은 이제 둘 사이의 조화로 바뀌었는데, 계시가 궁극적인 진리를 대표한다고 보았다. 교의학적 주장들은 성경의 신적 영감에 대한 강조를 통해 보호되었는데 루터파 신학자들은 이 강조를 통해 성경의 축자적 무오설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이는 반대편의 개혁교회(장로교)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덴마크의 대학들이 정통주의의 중심지였다. 작센의 선제후 프레데릭 윌리엄은 “루터의 성좌”인 비텐베르그 대학을 강력하게 지원했으며 대학은 “일치 신조문”의 설계자인 마르틴 켐니츠의 업적을 계속해나갈 목표를 세웠다. 정통주의 시대에 “마르틴 [켐니츠]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도 서기 어려웠을 것이다.”는 문구가 회자될 정도였다. 예나 대회에서는 요한 게르하르드(1582-1637)가 대표적 신학자로서 루터란 정통주의의 최고 걸작인 9권찌리 『신학의 주제들』(1610-1622)을었다. 마르부르그와 기센에서는 발차자르 멘처가, 당시 독일 영토였던 스트라스부르에서는 단하우어가, 라이프치히에서는 요한 휼세만이 정통주의를 대표했으며 코펜하겐에서는 한스 레센이 루터란주의를 “거룩한 신앙”으로 옹호했다. 루터란 정통주의의 최종 구현자는 쾨닉스부르그 등지에서 활약한 아브라함 칼로브 (1612-1686)인데, 그는 교회 지도자에게 필요한 모든 덕목들을 갖춘 “그리스도의 씩씩한 운동선수”로서 한 논쟁 주제에 대해 스물여덟 권의 책을 쓸 정도였으며 그의 말은 항상 최종적인 권위를 가졌다.
이 기간 중 발생한 30년 전쟁(1618-1648)의 끝에 체결된 “베스트팔리아 평화”는 영토의 통치자들에게 종교 문제에 관한 절대 권위를 부여한 아우그스부르그 평화를 확인했다. 이제 이 권위는 개혁교회(칼빈주의)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처음으로 일부 다른 기독교 그룹들도 자신의 지역을 떠나지 않고 사적으로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루터란 정통주의는 그 획일적인 문화 가운데에서 일부 다양성을 용인했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1685-1750)는 루터의 경건만 아니라 바로크 예술에 영향을 받은 다양한 형태의 곡들을 작곡했다. 길고 따분한 설교 다음에 찬송과 합창이 루터교 예배를 은혜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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