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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교회"(마 25:40 )

루터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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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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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자들루터교회
댓글 0건 조회 742회 작성일 21-03-2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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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  

 

  4. 경건주의 

 

루터란 정통주의는 1700년까지 강제된 관습이었으며 생동감 있는 영적 삶이 결핍되어 있었다. 교회 출석은 법률로 강제됐고 성찬 참여는 의무였다. 그러나 세속 군주가 우두머리로 있는 영토 교회 내의 폭정은 개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개혁 운동은 2의 종교개혁이었는데 그 선구자들이 스스로를 루터의 신실한 제자들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새 개혁 프로그램은 머리의 종교에 맞서 마음의 종교를 강조했다. 개혁의 옹호자들은 교의, 예배의식, 정치 형태에 대한 법적 강제력에 의한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마음의 진실된 헌신을 외쳤다. 그들은 단순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세상에서의 신실한 증거를 특징으로 했던 고대 기독교의 이상들을 회복하려고 했다.

 

정통주의가 한창일 때 일부 루터파 신학자들은 기독교가 교리체계라기보다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안내라고 주장했었다. 가장 특출난 인물은 요한 아른트(1555-1621)인데 그의 경건 서적들은 17세기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아른트의 주저인 참된 기독교에 관한 네 권의 책(1605-1609)은 묵상적이고 경건한 삶에 대한 안내서이다. 그는 경건주의 운동을 발전시킨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경건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영적 삶의 부흥에 대한 아른트의 강한 관심을 보존한 제자는 프랑크푸르트 목사 필립 이콥 슈페너(1635-1705)였다. 그는 1670년에 목사관에서 소그룹 모임을 갖기 시작했는데 30년 전쟁 이후의 교회와 사회의 타락상에 대해 숙고하고 신자 상호 간의 교화와 친밀함을 추구했다. “경건의 동지회로 알려진 이 모임은 경건주의 운동의 홀씨가 되어 급속히 퍼져나갔다. 슈페너는 1675경건한 열망을 출판했는데 이를 경건주의 운동의 효시로 본다. 그는 이 글에서 기독교적 삶에 대한 더 큰 헌신과 신학교육의 근본적 개혁을 호소했다. 이 운동은 마음의 종교와 개인의 경건을 강조하면서 기도, 성경 읽기, 도덕적 자기 살핌, 자선 행위들을 실천하기 위한 더 큰 교회 내의 작은 교회들을 조직했다. 슈페너는 국가교회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목사들의 무지와 교회 내 영적 생동감의 결여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슈페너의 이상들은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에 의해 독일의 할레 시에서 제도화되었다. 그는 프랑케 재단을 세웠으며 고아원, 인쇄소, 기타 기관들과 학교를 설립했다. 지금도 운영 중인 할레의 기관들은 거룩한 삶, 실천에 목표를 둔 교육, 곤경 중의 이웃에 대한 관심을 중요시한 경건주의 신앙을 실천에 옮겼다. 경건주의는 독일 내에서 첫 번째 공립학교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임마누엘 칸트와 헤르더와 같은 인물들이 프러시아 왕실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교육에 관한 경건주의자들의 강조는 독일 내 계몽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프랑케는 할레 경건주의의 교육 원칙을 전 세계 각지에 확립하려는 비전을 품었다. 경건주의는 기독교 일치에 대한 비전과 해외 선교에 대한 열망을 가졌으며 할레 재단이 선교사 훈련 센터가 되었다. 덴마크 식민지인 인도에서 경건주의 기독교를 퍼트리기 위해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코펜하겐에 세워졌다. 첫 번째 경건주의 선교사들인 지겐발그(1682-1719)와 플루차우(1677-1746)1706년 인도 트랑케바르의 덴마크 식민지에 파송되었다.

 

경건주의의 세 번째 유명인은 진젠도르프 백작(1700-1760)이다. 그는 교황 권위에 반대하다가 화형당한 보헤미아(현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1372-1415)의 추종자들인 모라비아 형제단이 자신의 영지 베르델스도르프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300여 명의 모라비안들은 1712헤른후트(주님의 보호)”라고 불린 수공업자와 농민들의 정착촌을 세웠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1741년 헤른후트를 잠시 방문한 적이 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아 공동체는 1749년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의 적법한 추종자들로서 또한 루터파 영토 교회의 일부로서 인정을 받았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아 형제단은 초기 루터란 선교의 또 다른 축을 이루었는데, 1732년 추첨으로 뽑힌 첫 번째 모라비아 선교사 둘이 서인도제도(아메리카 대륙 카리브해와 대서양연안 지역)에 파송되었다. 트랑케바르에서의 성공적인 선교 이후 코펜하겐의 선교대학은 노르웨이 목사 한스 에게데(1686-1758)1721년 그린란드에 파송했다. 이누잇족은 빵이 없었으므로 주기도를 번역할 때 우리에게 일용할 물개를 주옵시고라고 옮겼다. 그린란드 선교 소식을 접한 진젠도르프는 1733년에 그곳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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