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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교회"(마 25:40 )

루터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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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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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자들루터교회
댓글 0건 조회 734회 작성일 21-03-2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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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 


  1. 종교개혁운동으로부터 루터교회의 설립까지


루터교회는 교회의 갱신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작센의 소읍 비텐베르그(루터는 “문명세계의 변경”이라고 불렀다)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이 발단이 됐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수도승 사제이며 대학교수였던 마르틴 루터(1487-1546)는 시의 성채 교회 문에 면죄부와 관련한 교회의 관습에 의문을 제기한 95개 논제를 게시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와 분리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었으며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개혁에 대한 그의 외침에 모두 귀기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격렬한 논쟁이 잇따라 일어났다. 로마 교황(레오 1세)은 여러 차례의 회유와 협박이 통하지 않자 루터를 1521년 1월에 출교했다.


3개월 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는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와서 자신의 신앙을 방어하도록 불렀다. 당시 제국 국회는 도시들을 바꿔가면서 개최되었다. 루터는 국회에서 자신의 저술들을 철회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성경의 증거나 분명한 이성에 의해 확신하지 않은 이상.…어떤 것도 취소할 수 없고 그럴 뜻도 없습니다. …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황제는 보름스 칙령(5월 26일)을 공표하여 루터를 법익 피탈자로 선언하고 누구든 그를 돕는 것을 금지하고 그의 체포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에 호의적이었던 작센의 선제후 프레데릭 현자(1486-1525 재위)는 제국 내 강력한 지위를 이용하여 루터를 보호했다. (독일은 매우 지방 분권적이어서 다양한 형태의 지역들로 나뉘어 있었으며 황제 선거권이 있는 선제후는 7명이었다. 작센 지역 외에도 개혁자들은 개혁운동에 우호적인 통치자들의 보호를 받았다.)


한편, 루터의 자유하게 하는 '복음'을 오해하여 성상 파괴 등을 일삼은 급진적 종교운동이 비텐베르그에서 발생했으나 보름스 국회 후 머물러 있던 피신처에서 돌아온 루터의 설교(8회 연속)로 진정되었다. (1522 사순절). 이후 복음의 자유를 사회경제적인 자유로 오해하여 농민들이 일으킨 전쟁은 가톨릭과 복음 진영 제후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1524 1525). 한편, 스콜라주의의 조잡한 라틴어 구사와 난해한 논리 그리고 로마 교회의 미신과 오용에 반대했던 인문주의자들은 처음에 루터를 "우리의 마르틴" 이라고 부르며 동료의식을 느꼈으나 인문주의의 거두인 에라스무스와 루터와의 '인간의지의 노예'상태에 관한 논쟁(1525) 이후 로마가톨릭교회 안에 잔류했고 일부는 종교개혁 진영에 합류했다. 교리에 매몰된 스콜라신학 대신 고전어(헬라어, 히브리어, 고전 라틴어)에 대한 인문주의의 관심은 성경 연구를 중시한 개혁자들이 공유했으며, 루터의 비텐베르그 대학 동료인 필립 멜랑히톤(1497-1560)은 인문주의자였다.


루터는 설교, 저술, 강의, 서신왕래 및 가톨릭 신학자들과의 논쟁 등을 통해 개혁 운동을 조직하고 강화하며 확대해 나갔다. 종교개혁에 우호적인 제후들은 1526년 토르가우에서 보름스 칙령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이 긴장 상황으로 인해 같은 해 6월 슈파이어 국회가 열렸으며 (부재중인 황제를 대신하여 동생 페르디난드 대공이 주재) 보름스 칙령의 실행과 관련하여 영토의 제후들은 각기 “하나님과 황제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판단하는 대로 이 문제를 다룰 권한이 있다는 양보를 이끌어냈다. 애매모호한 이 문구는 종교를 영토의 정치와 통합해도 된다는 허가로 해석되었다. 작센 선제후는 자신의 영토 안에 루터란주의를 강화하는 데 이 양보를 사용했다. 루터와 멜랑히톤은 비텐베르그 시의회와 선제후 궁정의 도움을 받아 공적 예배의 개혁을 교육의 개혁들과 연계했다. 그들은 작센 지역에서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시찰 계획을 세웠다. 멜랑히톤은 법률가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시찰자들을 위한 가이드북 "시찰 조항들"을 작성했다. 첫 번째 시찰은 1528년 초에 있었다.


루터도 시찰을 다녀왔다. 그때 그는 교리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대교리문답서』를 썼는데, 서론과 다섯 부분(십계명, 사도신조, 주기도, 성찬 죄고백에 관한 짧은 권면)으로 구성했다. 『대교리문답서는『소교리문답서와 함께 1529년 인쇄됐으며, 가정집의 실내 벽에 붙일 수 있는 포스터 형태의 소교리문답도 나왔다. 『소교리문답서』 안에는 목판화들이 삽입되었고, 암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졌으며, 문답의 형태로 젊은이들을 세례 이후의 기독교인 삶으로 인도했다. 아침 기도, 저녁 기도, 식사기도, 십자가 성호 긋기도 부록으로 첨부됐다. 루터는 『대교리문답서의 서문에서 독자들이 그 내용을 "실제 경험으로 체험하고 그들이 이 가르침을 갖고서 마귀를 죽게 했다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 매일 교리문답을 반복하여 배우라고 권면했다.


교회의 삶의 새로운 형태들이 1520년대 말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루터가 이끈 개혁운동은 "루터파"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는 대적자들이 붙여준 것으로서 루터 자신은 극력 반대했다. 지금도 유럽의 루터교회는 "복음적"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복음주의"와 다르다)이라는 명칭을 병행하여 사용한다.


루터란주의의 확장은 가톨릭주의에 대한 점증하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1529년 2차 슈파이어 국회는 1526년의 결정을 철회했다. 황제는 회의를 주재할 페르디난드에게 지시하여 제후들이 보름스국회의 결정을 엄격히 시행하고 새로운 것들을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교황이 주재하는 주교들의 회의가 필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했었다. 작센 선제후 요한이 이끄는 여섯 명의 강력한 제후와 열네 개의 자유 도시가 여기에 반대했으나 페르디난드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 그룹은 1529년 4월 20일 공식적으로 "항거(프로테스테이션)"를 제출했다. 인간 권위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해야 한다는 사도적 명령(행5:29)에 따라 황제와 국회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침해하지 않는 한 황제에게 순종하겠다고 했다. 이 문서의 서명자들은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는데 이 단어의 한글 번역은 “개신교”이다.


한편, 루터파는 다른 개신교파들과 신학적인 타협을 하지 않았다.루터파 진영의 또 다른 영도자인 헤세의 필립이 마르부르그성에 초대한 개신교 신학자들의 회의(1529년 10월)에서 루터와 스위스의 츠빙글리는 복음의 이해에 대부분 동의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 내 임재방식에 대해서는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루터는 츠빙글리와 "영"이 다르다는 것, 곧 복음 이해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츠빙글리에 의해 시작되고 프랑스의 킬빈에 의해 확장된 개혁교회(장로교)와 루터교회 사이를 갈라놓은 가장 큰 주제는 성찬 이해이다.


터키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황제는 제국이 종교문제로 갈라지는 것을 막아보려고 1530년 아우그스부르그 국회에서 루터파의 입장을 듣겠다고 했다. 멜랑히톤이 루터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으며, 일곱 명의 제후들과 두개 시의회가 서명하여 6월 25일 제출했다. (루터란은 종교개혁이 신앙고백운동이었다는 점을 늘 강조한다. 세계의 일부 루터교회는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의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개신교의 마그나 카르타라는 평가를 받는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의 내용에 대해 루터는 “나는 그렇게 부드럽고 살포시 발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가톨릭측은 "반박문"을 제출했으며 루터파가 가톨릭 교리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고, 국회는 다시금 보름스 칙령의 집행을 촉구했다.


황제와 가톨릭 제후들의 위협 아래 있었던 복음 진영의 군주들은 1531년 2월 슈말칼드 군사동맹을 맺었으며 가톨릭 군주들 역시 군사동맹을 맺었다. 루터가 사망한 해에 슈말칼드 전쟁(1546-1547)이 발발했고 황제 측이 승리했다. 1548년 황제는 교회 공의회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과도기적인 "아우그스부르그 가협정"을 이끌어냈는데 (5월) 복음 진영에게 약간의 양보를 하면서도 전통적 가톨릭 교리와 실천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를 이행한 독일 지역은 거의 없었으며, 로마 교황청, 프랑스 영국 등도 정치적 이유로 반대했다. 작센 선제후 모리스로부터 임무를 맡아 필립 멜랑히톤이 작성한 "라이프치히 가협정"(12월)은 이신칭의 교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고수하는 한편 가톨릭의 의식들과 정치체제는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그가 이끄는 필립파와 루터의 진정한 제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엄수 루터파 사이에 갈등이 드러났다. 후자는 핍박의 상황에서는 비본질적인 것(아디아포라)도 복음의 신실한 증언으로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 사이의 논쟁은 1555년의 “아우그스부르그 평화”로 가는 길을 닦은 파사우 조약(1552) 때까지 극렬했다. 과거 자신의 야욕을 위해 복음 진영을 배신하여 "마이센의 유다" 라는 별명을 얻었던 모리스가 이번에는 황제에 맞선 반란에 앞장 서 그를 패퇴시키자 황제는 개신교 제후들과 파사우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조약은 차기 국회의 결정시까지 루터란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으며 슈말칼드 동맹의 지도자들에게 사면을 베풀었다. 이로써 아우그스부르그 가협정의 시행이 취소되었다.


아우그스부르그 평화는 루터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제국의 권력에 대항한 한 세대에 걸친 투쟁 이후 루터란들은 특정 지역의 통치자가 지역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영토주의'의 수립을 통해 법적 지위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제후의 종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영토주의의 수립으로 루터파 교회는 해당 지역들에서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위협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대신 내부적으로 제후의 지배와 간섭을 받았다.(영토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1914 1918>의 종식과 함께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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