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Ⅳ. 유럽과 북미를 넘어선 전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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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아메리카
루터란이 남아메리카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1528년 현재의 베네수엘라 지역에서였다. 독일 이민자들의 공동체가 세워졌는데 그들 중 일부가 루터란이었다. 이후 이 식민지는 붕괴됐고 루터란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남아메리카의 루터교회는 호주와 캐나다처럼 대부분 이민자 교회로 시작했다. 브라질(1889년까지 포르투갈 제국의 일부)에는 처음에 독일 루터란들이 왔다. 헤세 출신 루터란 작가인 한스 스타덴이 단독으로 와서 1557년 원주민에 대한 글을 썼다. 1823년 5천명의 독일 정착민들이 상 레오폴도 근처 농장에 도착했다. 모국의 교회들이 이민자들의 교회를 조직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독일 선교회들은 원주민들에게도 전도를 계속했지만, 선교와 식민지화를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미주리 시놋은 1899년에 선교를 시작했으며 “루터란 아워”를 통해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남아메리카인들에게 라디오 방송을 송출했으며, 1903년 포르토 알레그레에 신학교를 세웠다.
푸에르토리코에는 1898년 미국 아우구스타나 시놋 소속 대학생이었던 구스타브 스웬손이 와서 선교센터를 열고 이중 언어(영어와 스페인어) 예배를 인도했으며 이후 목사로 사역했다. 버진 군도 특히 무역의 중심지인 성 토마스 섬에 덴마크 이민자들과 무역상이 루터란주의를 들여왔다. 이미 1730년 이후 모라비아인들이 그곳에 있었다. 노예들이 해방되자(1841) 루터란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교육을 제공했다. 성토마스의 덴마크어 예배의 첫 번째 성가대원은 흑인들이었다. 브라질 다음으로 루터란주의가 인기를 누린 곳은 가이아나(브라질 북쪽에 위치. 1970년 독립 때까지 영국령)였다. 1743년 첫 번째 루터교회인 에벤에셀이 세워졌다. 원주민 개종자로서 런던 선교회의 훈련을 받은 미텔홀저가 1878년 목사로 취임했다.
루터란주의는 수리남(남미 대륙 북쪽에 위치한 네덜란드 식민지. 1975년에 독립)에서도 일찍 발견되었다. 루터란들이 1741년 암스테르담에 있는 루터란 콘시스토리의 관할권 아래에서 교회를 조직했다.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의 목사들이 수리남 루터교회를 섬기기 위해 파송되었다. 모라비아인들은 1902년 신학교를 세워 루터교와 기타 개신교 목회자 후보생을 배출했다.
페루(1824년까지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1899년에 스위스와 독일 정착민들에 의해 독일어권 루터교회가 세워졌다. 고(古) 프러시아 복음교회가 목사들을 공급했다. 이 프러시아 교회는 베네주엘라(스페인 식민지, 1811년 독립)의 카라카스에 1870년대에 세워진 루터교회에도 목사들을 보냈다.
아르헨티나(스페인 식민지였다가 1816년 독립)에서의 루터교 시작은 1843년으로서 이 해에 브레멘 선교회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최근 조직된 교회를 섬기도록 아우구스트 지겔 목사를 파송했다. 교인들은 독일 식민지 정착민들이었다. 인접 지역(파라구아이, 브라질, 칠레)에서 온 목사들이 1863년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본부를 둔 독일 복음 라 플라타 시놋(1900)의 기초가 되었다.
칠레(스페인 식민지였다가 1826년에 독립)의 루터란주의는 발파라이소(1822)와 산디아고 (1845)의 독일인 정착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칠백여 독일인 가구가 1848년의 유럽 혁명 이후 개인적으로 온 두 목사의 목양을 받았다. 1863년 이후에는 점증하는 교회들이 프러시아 루터란 연합교회로부터 온 목사들의 돌봄을 받았다. 프러시아 연합교회는 1900년 칠레의 교회들이 프러시아 연합의 일부라고 선언했다.
파라과이(1811년 독립할 때까지 스페인 식민지)의 루터란주의는 1893년 한 독일 교회의 형성으로 시작되었다. 우루과이(스페인 식민지였다가 1830년에 독립)의 몬테비데오에는 1857년 루터란 정착민들의 교회가 세워졌는데,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 교회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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