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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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루터교회의 설립부터 근대까지의 역사
5. 근대
근대 과학 혁명의 통찰을 받아들인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는 기적들과 예언의 성취와 신적 계시에 관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전제들에 대해 도전을 했다. 크리스티안 볼프(1679-1754)와 요한 살로모 제믈러(1725-1791)와 같은 루터파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성과 계시의 조화를 변호했다. 중세 스콜라주의는 이성의 사용을 옹호했지만 계시의 우선성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루터파 신학은 계시를 이성에 종속시켰고 이성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선언했다. 네올로지(새 것들의 연구)라고 알려진 이러한 정서가 당시의 루터란주의를 지배했다. 그 결과, 자유주의 진영과 보수주의 진영이 19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이 분리는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루터란주의의 전개 양상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다른 개신교회들의 상황과 매우 닮아 있었다. 이 교회들 간에 교파적인 차이점은 크게 없었고,실제적 구분선이 기독교가 사실상 자연 종교라는 계몽주의의 새 사상들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이 사상들을 거부한 사람들 사이에 그어졌다.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루터파와 개혁교회 사이의 전통적인 신학 논쟁들은 근본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프러시아 왕 프레데릭 윌리엄 3세(1770-1840)는 종교개혁 300주년을 맞는 1817년 영토 내 루터파와 개혁교회가 새로운공동 예배 의식문을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프러시아 왕실은 17세기초 이후 칼빈주의를 추종한 반면 왕국의 백성들은 루터파였다.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이후 프러시아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상당한 수효의 개혁파 주민들이 추가됐지만 말이다. 경건한 신자였던 왕은 두 교파를 분리할 만큼 신학적 치이가 크지 않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프러시아는 행정상의 포괄적인 재편성을 단행하여 정부를 상당히 중앙집권화한 상태였다. 이제 왕은 루터파와 개혁파 교회에 대해서도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옛 루터란들"은 개혁교회와의 연합을 왕의 폭정으로 거부했다. 왕은 투옥과 군사행동으로 압박했으나 소용없었고 마침내 합병안을 취소했으며 그들이 프러시아 복음 루터교회를 조직하는 것을 허용했다.
'새 루터란들'이 '옛 루터란들'의 뒤를 이었는데 이들은 고대 예배의식 전통들을 부흥시키려고 했고 루터파 신앙고백들에 대한 충성을 성례전과 교회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와 결합하려고 했다. 옛 루터란들과 ‘새 루터란들'은 184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루터교회와 그 신학을 지배했다.
각성 운동은 보수적, 신앙고백적인 루터란주의의 요새인 에어랑겐 대학을 중심으로 독일 전역에 퍼졌다. 새 루터주의의 전형적인 모델 교구가 빌헬름 뢰헤(1808-1872)에 의해 1837년 바바리아의 소읍 노이엔데텔자우에 조직되었다. 그는 부속 집들, 병원들, 교육 기관들과 함께 디아코니아회(봉사회)를 조직했고 풍성한 새 예배의식을 만들었으며, 북미, 남미, 호주와 연결된 선교회를 세웠다. 그는 루터란 신앙고백서들이 성경과 일치하는 “한"에서 참인 것이 아니라 성경과 일치하기 “때문에" 참이라고 주장했다.
스칸디나비아의 루터란주의는 독일의 새 루터란주의의 영향을 받있지만 엄격히 신앙고백적이진 않은 각성을 경험했다. 그룬트빅(1783-1872)은 덴마크의 루터란주의에 영속적인 흔적을 남기게 될 운동을 1830년에 시작했다. 그룬트빅과 그룬트빅주의는 설교와 찬송(그룬트빅은 무려 1,500편의 찬송을 작사했다!), 성인교육 소책자들을 통해 전 덴마크 문회를 빚어냈다. 노르웨이 각성의 리더는 평신도 설교자이며 사업가인 한스 니엘센 하우게(1771-1824)였다. 그는 길거리 설교와 국가교회밖 회합을 금지한 노르웨이 국법을 어긴 죄로 여러 차례 체포됐으나 국가교회에 충성했다. 스웨덴에서는 래스타디우스 목사(1800-1861)와 평신도 설교자 로세니우스 (1816-1868)가 도덕적 중생과 국내외 선교를 호소하는 부흥의 중심이 되었다. 핀란드에서는 “광야의 예언자”로 불리는 농부 루오토살라이넨(1777-1852)의 순회 설교로 인해 부흥이 일어났다.
19세기 독일의 루터란 신학은 세 학파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파울루스(1761-1851)가 대표하는 자유주의 학파이고, 두 번째는 헹스텐베르그(1802-1869)와 하름스(1778-1855)가 대표하는 전통적 신앙고백적 학파이며, 세 번째는 네안데르 (1789-1850)를 포함하지만 주로 슐라이어마허(1768-1834)의 영향을 받은 중재 학파이다. 19세기 후반에 알브레히트 리츨(1822-1889)은 기독교 신앙과 근대성 사이의 통합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이 시도는 어느 특정 학파에도 맞지 않았으며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초자연주의자들과 이성주의자들 모두에 의해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실천적 기독교에 대한 계속되는 관심으로 인해 독일에서 국내선교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스칸디나비아는 그보다 낮은 정도로 진행되었다. 해외에서 비기독교인들을 회심시키는 복음전파가 진행되는 동안 진행된 이 운동은 국내의 문제들을 다루는 "본국 선교"가 되기를 원했다. 국내 선교는 이웃 사랑과 디아코니아 섬김에 대한 성경적 부름의 실현에 대한 보편적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루터교 목사 테오도르 플리드너(1800-1864)는 가난퇴치 프로그램과 감옥 개선, 그리고 새로운 산업 사회 안에서의 여성의 활동적 역할을 옹호했다. 그는 카이저베르트에 빈자들을 위한 병원만 아니라 첫 번째 디콘네스 집을 세웠는데 이 곳은 안수에서 제외된 여성들이 전문적으로 교육과 목회적 돌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센터였다. 점차 수많은 본부가 생겼으며 미국의 피츠버그와 예루살렘에도 하나씩 생겼다. 병원 간호의 선구자이며 전쟁터 부상자들의 돌봄으로 유명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은 1851년 카이저베르트의 본부에 와서 머문 적이 있다.
국내 선교를 가장 효율적으로 감당한 사람은 경건주의와 사회행동의 신학으로 양육 받은 요한 비헤른 (1808-1831)이다. 그는 1833년 함부르그에서 굶주리는 거리의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센터("거친 집")를 세웠다. 센터의 소식을 담은 소책자들이 비헤른의 사역을 독일 안팎에 널리 알렸다. 비헤른은 1848년 비텐베르그에서 개최된 제1회 “교회의 날" 모임에서 전국에서 온 대표들에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옹호하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의 전략이 사회의 갱신에 필요하다고 뜨겁게 호소했다. 그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 사역을 조직했으며 그의 지도하에 국내 선교 운동은 독일 전역에 걸쳐 지부를 세웠다(기독교한국루터회에서는 1967년부터 비헤른 봉사상을 매년 수여했다.) 그의 사후 프레데릭 보델슈빙(1831-1910)이 국내 선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여러 지역에서 가난한 자, 간질병자, 정신질환자, 버림받은 사람들 등을 위해 일했는데 “적선 대신 노동”이라는 그의 모토가 치유의 방법이었다. 그는 백일해로 인해 자녀 넷을 두 주 사이에 모두 잃은 적이 있는데,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얼마나 혹독하실 수 있는가를 깨달았으며 그로 인해 타인들에게 더 열정적이 되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그는 베델 선교회의 전신인 독일 동아프리카(현 탄자니아) 선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국내 선교는 노르웨이, 덴마크, 오스트리아로 퍼졌다. 오스트리아의 파사반트(1821-1894)는 북미에 국내 선교의 첫 네트워크를 세웠으며 1849년 피츠버그에 첫 번째 루터란 병원이 세워졌다.
국내 선교 운동은 산업혁명의 일부 해악들을 개선하긴 했지만 그것이 만들어 낸 인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변화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편, 운동은 루터란이 가는 전 세계 어디서나 사회의 희생자들을 위한 돌봄을 지속적으로 제공했으며,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루터란의 견해를 사회개혁으로까지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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