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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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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Ⅱ. 유럽과 북미 전파 : 종교개혁 시기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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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자들루터교회
댓글 0건 조회 606회 작성일 21-08-0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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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부 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루터의 개혁 운동은 강력한 물줄기와 같아서 수원인 비텐베르그로부터 여러 방향으로 흘러갔다. 운동은 독일의 많은 지역으로 흘러가고 스칸디나비아 전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새로운 종교적 지형을 만들었다. 또한 16세기 초반 유럽의 기타 지역으로 시내를 이루어 들어갔다. 곧 발트 지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과 동유럽(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심지어 가톨릭이 지배적인 남쪽과 서쪽으로(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퍼져나갔다.

 

(1) 동부 유럽

 

16세기에 루터란 사상은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트란실바니아(현 루마니아)로 들어갔다.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이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정부 당국의 지원이 없었으므로 새 교회의 형성이 어려웠다. 결국 이 지역에서 루터교회들은 점차 더 역동적이 되고 소생하는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에 굴복하게 되었다.

 

발트 지역(발트해 동쪽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3) 리보니아(현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에는 루터파 사상이 1521년 나타났다. 성 베드로교회 목사가 멜랑히톤과 접촉한 뒤 루터파 사상을 가르쳤으며 성야곱 교회 목사가 도왔다. 시의회는 루터와의 서신 왕래에 고무되어 두 목사를 지원했다. 루터란 가르침이 1523년 에스토니아 레발(현 탈린)의 중심적인 세 교회의 설교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 공작령에는 루터란주의가 1530년 이후 등장했는데 일부 귀족들과 시민들과 사제단의 옹호를 받았다.

 

폴란드에서는 루터의 개혁에의 외침이 일찍이 들렸다. 그단스크(단직) 시민들은 1518년에 95개 논제를 접했다. 보헤미아 왕국과 모라비아 후작령(두 지역은 이후 체코슬로비키아로 합침)에서 루터란 개혁 운동은 즉각적이고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보헤미아는 1415년 화형당한 얀 후스의 모국으로서 반() 가톨릭 성향이 강했다. 작센에 근접한 보헤미아의 독일인들은 1520년 이후 작센의 후스인 루터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루터파 개혁운동은 모라비아에서도 모라비아 후스파의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영도자인 얀 로는 1520년 이후 루터를 지지했고 다른 후스파 성직자들과 함께 여러 차례 루터를 방문했다. 루터는 일부 교리상의 차이점-목사의 독신과 성례전의 의미에 대해-에도 불구하고 모라비아(보헤미안) 형제단다른 누구보다 더 복음에 가까운사람들이라고 인정했다.

 

헝가리에서는 여행하는 상인들을 통해 루터란주의가 알려지게 되었다. 루터의 95개 논제가 루비카(케주마로크 근처)에서 낭독되었으며 그의 논문들이 여러 다른 지역에서 등장했다. 헝가리 학생들이 1522년부터 비텐베르그에서 공부했다. 이미 1520년 루터의 사상이 트란실바니아(현 루마니아의 독일인들 사이에 퍼져서 개혁 운동이 급속히 성장했다. 오스트리아 같은 가톨릭의 철옹성인 합스부르그 지역들도 루터란주의가 16세기 전반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비엔나에서 1519년과 1522년 사이 15편의 루터 저술이 출판되었다.


(2) 스칸디나비아

 

여행하는 상인들과 학생들이 루터란 사상을 스칸디나비아에 소개했다. 당시 스칸디나비아는 덴마크 왕실의 통치하에 위태롭게 연합해있었다. 1510년대에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2(1481-1559)와 스웨덴 귀족들 간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구스타브 바사(1496-1560)가 출현하게 됐는데 그는 스웨덴의 독립을 쟁취했으며 마침내 스웨덴과 핀란드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처음부터 바사는 스웨덴 내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재정적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고 루터파 설교와 출판을 지지했다. 그의 명령으로 1527년 베스테로스에서 열린 국회는 가톨릭교회 재산을 몰수했고 성직자들의 시민 법정 면제권을 철폐했으며 오직 순수한 하나님 말씀만 설교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어지는 법적인 수단들을 통해 스웨덴 내의 가톨릭주의를 축소시키다가 마침내 종결했다.

 

바사는 1528년 가톨릭 주교인 페트루스 마그니가 세 명의 루터파 감독을 축성하도록 했다. 이로써 스웨덴 감독제의 공식적인 사도적 전승이 확보됐다(가톨릭교회는 그들이 초대 주교라고 주장하는 베드로로부터 중단 없이 내려오는, 안수례에 의한, 사도적 전승을 강조한다). 라우렌티우스 페트리 감독(1499-1552)1531년 제1대 루터란 웁살라 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형 울라우스 페트리(“스웨덴의 마르틴 루터” 1493-1552)는 비텐베르그에서 공부하는 동안 루터의 사상에 심취했었다. 두 형제는 구스타브 바사 왕에게는 없는 깊은 개신교적 확신을 갖고서 스웨덴에서 루터란주의를 대중화하는 일을 수행했다. 울라우스가 왕과 자주 갈등을 빚었지만 그와 개혁의 동료들은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의 개혁은 미카엘 아그리콜라(1510-1557)가 수행했다. 그도 비텐베르그에서 수학했는데 나중에 오부에서 감독이 되었으며 신약성경을 핀란드어로 번역했다.

 

스웨덴은 17세기까지 유럽의 상당한 정치적 세력으로 있었다. 161830년 전쟁이 발발하자 스웨덴은 처음에 중립을 지켰는데 북방의 사자'라 불리는 구스타브 아돌프 2(1594-1632)1630년 전쟁에 고전하는 독일 개신교 영토들 편에 섰다. 그의 군사적 승리들 특히 루첸 전투(그 자신은 전장에서 사망했다)에서의 승리는 30년 전쟁이 개신교를 결딴내지 않도록 해주었다. 이후 스칸디나비아의 루터란화의 과정은 독일의 루터란화의 과정을 따랐다.

 

루터란주의는 덴마크에서도 통치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비텐베르그로부터 2명의 신학자가 와서 운동의 전파를 도왔으며 1528년 스칸디나비아의 첫 번째 루터교회가 세워졌다. 오덴세에서 두 차례 열린 귀족들의 회의(1526, 1527)는 덴마크가 교황으로부터 자유하다고 선언했다. 가톨릭 주교들은 면직됐으며 1537년 루터파 국가교회가 수립되었다. 크리스티안 3세 왕(1534-1559 재위)은 비텐베르그 시교회의담임 목사인 요하네스 뷰겐하겐을 임명하여 2년간(1537-1539) 교회 조직의 리더를 맡도록 했다. 그의 부재 중 루터가 설교를 했다. 뷰겐하겐은중세 전통을 따라 왕과 왕비의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일곱 명의 새 루터란 감독들을 취임시켰다. 뷰겐하겐 자신은 가톨릭 주교에 의해 안수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스웨덴 루터교 감독들과 달리 더이상 사도적 전통에 있지 않았다.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한 지방으로서 종교개혁을 경험했다. 최대도시인 베르겐에서 1526년 루터파 설교 활동이 있었는데 루터파 가르침이 한자 동맹의 지역들에서 수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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