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세계루터교회사 Ⅱ. 유럽과 북미 전파 : 종교개혁 시기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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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아메리카
미국의 최초 루터파 교회들이 17세기에 현재의 뉴욕, 델라웨어지역의 작은 공동체들 안에 세워졌다. 이들은 정통주의 루터파 신앙고백주의와 경건주의의 계승자들이었다. 루터란 이민자들의 첫 번째 큰 물결이 1740년대에 도달하여 뉴욕, 남북 캐롤라이나,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했다. 이들 사이에 언어, 전통, 선교에 관해 분쟁이 생겼다. 그러자 할레 재단은 분쟁 중인 미국 루터란들을 화해시키고 조직하기 위해 뛰어난 졸업생인 헨리 멜키오르 뮬렌베르그(1711-1787)를 보냈다. 그는 곧 미국 루터란주의의 “교부가 되었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루터파 지역교회들과 학교들을 세웠으며 특히 펜실베이니아에 세웠다. 스칸디나비아 출신 루터란들은 19세기에 미국 중서부의 초원 지역에 정착했는데 각자 떠나온 고국 교회의 삶의 형태들을 보존했다.
서로 다른 국가적, 인종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와 맞닥뜨리고 서로 접하면서 다시금 갈등이 일어났다. 게티즈버그의 루터교 신학원 교수인 사뮤엘 슈무커(1799-1873)는 루터교회가 독일어 찬송 대신 영어 찬송을 채택하고 개혁교회들(칼빈주의)과의 협력을 통해 미국적 방식들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의 수정을 제안하는 『확고한 발판』(1855)을 익명으로 출판하여 자신이 속한 제너럴 시놋 교단 목사들에게 발송했다. 그러나 그 수정은 루터란의 특징적인 가르침들을 제거했고 성찬관은 칼빈주의, 심지어, 츠빙글리에 가까웠으므로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대부분의 루터란 교단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찰스 크라우스(1823-1883)는 루터란의 독특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필라델피아에 세워진 새 신학원을 이끌었다.
19세기 중반 새로운 독일의 이민 물결이 일었는데 그들은 당시 독일에서 지배적이었던 신앙 고백적 루터교 성향을 가지고 왔다. 1839년 700명의 작센 루터란이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미국 미주리주의 세인트 루이스(와 페리 카운티)로 이주했다. 지도자인 드레스덴 목사 마르틴 슈테판은 교인들에 의해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새로운 리더인 카알 페르디난드 월터(1811-1887)는 1847년 설립된 미주리 시놋의 총회장으로서 루터란 신앙고백서들에 대한 충성을 외치며 시의 미래에 대한 기틀을 세웠다. 네 개의 그룹이 합쳐서 형성된 시놋은 루터란주의가 미국화되는 것을 막으려 했으며 1846년의 연합 선언에서 루터교 신앙고백서들을 “하나님 말씀의 순수하고 순전한 해설이며 설명으로 확인했다. 슈무커의 확고한 발판이 등장했을 때 미주리시놋은 이를 “합리주의와 열광주의와 로마 가톨릭주의의 혼합'이라고 묵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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